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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전 작업 /2011년사건기록들

엄마들은 왜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미친 듯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는가.(하)


이하는 2011년 9월 21일에 있었던 <노회찬마들연구소 37번째 명사초청월례특강> 강연 내용이다. 봉준호 감독이 강연을 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올린다. 노회찬 전 의원님의 허락 하에 강의내용을 녹음했다.


봉준호감독 강연내용①
☞ 엄마들은 왜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미친 듯 춤을..?
봉준호감독 강연내용 ☞ 엄마들은 왜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미친 듯 춤을..?






저희는 어렸을 때부터 온 식구들이 레져 스포츠, 여행 이런 거 전혀 하지 않았어요. 일 년 내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면서 집에 내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들에 대해서 저는 민감했었죠. 어렸을 때부터, 배우들의 장단점에 대해서. 변해봉 선생님도 그래서 일을 같이 하게 된 거예요. 어렸을 때 어떤 드라마(남국동아저씨?)에서는 점쟁이 역할로 나온다든가, 수사반장에서는 사이비 교주로 나오고요.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던 게 있어서 변해봉 선생님과 일을 하게 된 거고요.

김혜자 선생님에 있어서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인터뷰에서도 몇 차례 말씀드렸는데 김혜자 선생님은 자상하고 부드럽고 희생적인 이미지인데 저는 그 분이 가끔 어떤 이상한 드라마, 인기가 별로 없는 드라마의 구석진 장면에서 이상한... 또 갑작스럽게 나오신 토크쇼에서 말씀하신 걸 보면, 외람된 표현을 쓰자면 정말 적나라한 단어지만 미친 4차원 이구나..

저는 그 표현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모두 저 분이 위대하고 국민 어머니의 상을 가지고 있지만 저 분의 뒷면에 이상한 광기가 얼룩져 있을지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女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최불암/김혜자/신은경 출연) 거기서 보면 딸이 신은경이 딸이 어렸을 때 김혜자 선생님이 유괴를 해서 키운 거예요. 김혜자 선생님이 극중에서 불임인데 아이가 갖고 너무 싶어서 바닷가에서 쌍둥이 여자 아이 중에 하나를 훔쳐 와서 키운 거예요. 출발부터가 어두웠어요. MBC 드라마였는데 어두웠는지 인기가 없었어요. 저는 그 드라마가 좋았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범죄 추리 소설 광이었어요. 어두운 이야기에 끌리고 살인사건 좋아하고....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지요. (청중 웃음) 저희 부모님들은 그 드라마를 싫어했지만 저는 열심히 봤지요. 그 드라마의 초반에 김혜자 선생님이 이상한 광기를 폭발시키는 장면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연기의 스팩트럼이나 그 범위를 확 넘어 있어요. 발작 증세를 확 보이는 게 있는데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 관점을 넘어서 대게 보기 불편한 장면이에요. 갑자기 안방극장에 핏덩어리 하나를 불쑥 툭 던지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쁠 수 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안방극장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잖아요. (청중 웃음) 그 신들린 듯한 광기의 순간이 女라는 드라마에서 그게 너무 각인이 돼서.. 자살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거 다 지워지고, 그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별안간 토크쇼에 나왔는데 계속 동문서답을 하는 거예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4차원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대산의 충격도 있었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춤추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한쪽에서는 자라나고 한쪽은 어렸을 적부터 김혜자 선생님에 대한 저 분은 미친 4차원? 이것이 하나로 만난 것이 그게 2004년이었어요.

그때가 살인의 추억이 끝나고 괴물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요.

한강대교 자료를 수집하고 아직 괴물은 2005년에 촬영을 하는데, 다음 영화 다음 다음 영화까지 준비를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이 영화를 못 찍게 되면 어떡하나. 나도 처자식이 있는데

굶기면 어떡하나 라는 근본적인 공포감이 있어요. 영화감독님 들의 공통점은 다 그걸 거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영화 찍는 것. 그게 대게 어려워요. 데뷔작이 유작이 되는 감독님도

많고 이야기가 샜는데..... 달리는 버스위의 춤추는 여인들, 김혜자 여인 그게 2004년에 합쳐지면서 어느 날 어느 순간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스토리가 나와요.

김혜자 선생님을 모시고 엄마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그렇지만 기존의 늘 있었던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해서 김혜자 선생님이 갖고 있는 모성에 대한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뒤집거나 파괴해야겠다. 모성애 극단을 탐사해보자. 이런 목표가 2004년에 생겼고, 살인의 추억 개봉 하에 그 대본이 어렴풋이 있었는데... 살인의 추억에 대한 인터뷰를 하다가 기자가 다음에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있으면 말해보세요. 라고 해요. 그게 기자 분들의 함정이에요. 다음 신문에 <봉준호 감독 누구누구에게 러브콜> 이렇게 나오지요. 저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원래 김혜자 선생님을 생각해왔기 때문에

"김혜자 선생님과 꼭 작업을 해보고 싶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김혜자 선생님이 그 기사를 보신 거예요.

다행히 김혜자 선생님이 살인의 추억을 대게 좋아 하셨어요.

그리고 어떤 루트를 통해서 연락이 왔어요. 저로서는 인생에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는데,

2004년에 김혜자 선생님을 여의도에 있는 렉싱턴 호텔이라는 식당에서 처음 뵙게 됐어요. 그리고 선생님과 영화를 하고 싶다. 이것은 지금 선생님을 캐스팅 하는 차원이 아니라 선생님 때문에 이 영화를 하는 거다. 스토리 써놓고 배우를 고르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싫어하시면 나는 이 영화 자체를 접는 것이다. 라고 저도서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저도 사실 그런 생각이었고 김혜자 선생님 때문에 기획한 것인데 동시에 대게 공포스러웠지요. "싫다"고 하시면 어떡하나...하고.

2004년에 식사를 하면서 그 스토리를 말씀드렸어요. 10분 안에 설명을 해야겠다. 이거 길어지면 안 된다.. 하고. 아까 보셨잖아요. 어머니와 아들이 손에 피를 묻히고... 그 비슷한 이야기를 김혜자 선생님 앞에서 한 거예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긴장되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다.... 목격자를 선생님이 죽이게 된다. 그것도 잔인하게.... 마지막 신을 말씀드렸어요. 모든 진실은 덮어지고 선생님은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버스 안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가운데 버스가 저 멀리 멀어져 간다.... 아련한 느낌으로 ...

그런데 그 이야기를 딱 들으시더니

"좋아요. 할게요. "

하시더라고요. 단칼에. 자기가 그 동안 했던 거랑 많이 다르다. 그래서 좋다. 하시더군요.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죠. 그때 김혜자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특히...

"아이.. 봉감독님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아요. "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저의 오대산에서부터 이어져왔던 마음을 아셨는지 모르지만 버스에서 춤을 추며 멀어져간 그게 너무 좋다. 아련하게 인상에 남는다... 라고 하시더군요. 2004년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김혜자 선생님은 바로 찍게 되시는 줄 아셨어요.

그래서 제가

"사실은 내년에 영화를 하나 하는 게 있어요."

"뭐예요?"

" 한강에서 괴물이 영화가 준비하고 있어요."

"어머.. 봉감독 그렇게 안 봤어요."

상상이 안 가셨나봐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그런 건 아니고요. 2008년에 영화를 찍게 될 것입니다."

사실 4년이라는 게 올림픽 기간인데, 처음 스토리를 말씀드리고 하나를 찍기까지 4년이 걸리는 거예요. 한번은 2005년 말이었나. 제가 한강에서 송강호씨와 괴물을 찍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김혜자 선생님이

“뭐하세요? 지금.”

"지금 괴물촬영하고 있습니다. 원효대교에서 "

"아, 그래요? 언제 끝나요?"

“아 저기... 이제 컴퓨터 그래픽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김혜자 선생님이

“봉감독 내가 하루하루가 달라요." (청중 웃음)

기다리다 치셔서

“나 자꾸 방송국에서도 자꾸 할머니 역할이 들어와요. 마더는 엄마잖아. 그랜드 마더가 아니라면...”

와... 압박을 주시는데... (청중 웃음) 저는 심장이 나불나불하고.. 그런데 2007년에 일본에 가서 옴니버스 영화 찍었어요. 전화 드렸더니 한숨을 쉬더라고요. 그래서 단편영화다., 옴니버스라서 제가 찍는 거라서 30분 분량이라서 금방 돌아오겠다.

또 한숨을 푹 쉬시면서... 대게 오래 기다리셨어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에서 옴니버스 영화를 찍고 나서는 그 해 10월에 한국에 돌아와서 마더 최종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작가들이 2006년과 2007년에는 진행을 잘 하고 있었고 그것을 넘겨받아서 최종시나리오를 한 6개월 정도 작업했어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3월 까지. 드디어 2008년 3월에 시나리오를 받아보셨지요.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에 달리는 버스의 춤추는 여인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가 돼 있었지요.

라스트 신을 찍다보니까, 시나리오를 마무리할 때, 처음에도 춤을 출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시작에 김혜자 선생님이 갑자기 어이없는 춤을 추잖습니까. 춤에서 시작해서 춤으로 끝나면 어떨까.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춤을 추는 것이고.. 하나는 들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들판이 살인을 저지르고 난 직후에 온 들판이지요.

그 장소에 의미가 있지요. 뫼비우스 띠가 이중으로... 살인사건의 장소와 장소 엇갈리면서, 빗나가 있는 뫼비우스 띠의 구조가 돼 있는데 어쨌든 시나리오 작업에 이런 구조가 떠오르게 된 것도 라스트 신 때문에 오프닝 신도 이렇게 된 거예요. 어쨌든 오대산에서 시작된 것과 김혜자 선생님이 뭐라고 하냐면 발원지라고 하나.. 한강 보면 남한강 북한강 거슬러 올라가면 물이 처음에 시작된 지점이 있잖아요. 발원지라고 하지요. 두 개의 발원지인 것 같아요.

2004년도 2008년도를 거치면서 잠복해 있던 바이러스 들이 확 올라왔지요. 이것을 찍어야겠다. 춤을 추는 아줌마들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수백만 가지가 있어요. 어디에 카메라를 두고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수백만가지의 choice가 있는데 그 선택은 감독의 몫이에요.

저는 시나리오를 썼듯이 발원지가 저에게 있었지만

기획자나 예를 들어 시나리오 작가가 옆에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자가 대게 중요한 것은 춤을 춘다고 했을 때 어느 위치에 어떤 렌즈를 끼어서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느 움직임을 찍을 지를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은 수만 수천 수백만 가지가 있어요. 그 중에 하나를 감독은 정하는 것이지요. 감독은 이미지를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2008년에 그 시점이 다가오는 것이고 이 시점에서 저의 동반자가 <홍영표>라는 사람인데, 촬영감독이에요. 감독과 촬영감독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하곤 해요. 애정의 관계로 볼 수 있지요. <홍영표> 영어이름은 <알렉스 홍>인데, 내가 조감독 시절에 이 형은 촬영스텝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형이었어요. 문신도 같이 커플문신을 하고요. (청중 웃음)

맨날 말만 하면 생각하면 뭐해요? 찍어서 보여줘야죠. 그런데 찍기 위해서는 최전방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촬영감독이 있어야 해요. 제가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지요. <봉>과 <홍>이 커플문신을 하고 처음부터 촬영하는 것도 딴 영화는 모르겠는데 오프닝과 라스트 만큼은 정말 잘 찍고 싶다. 목숨 걸고 찍겠다고 하는데....

제가 괴물과 살인의 추억은 김형구 감독님과 일을 했어요. 그 분은 또 다른 거장이지요. 촬영감독계의 또 다른 거장이신데, 마더는 괴물과 살인의 추억과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홍영표 감독이랑 하게 됐고 .. 영화의 성격이나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살인의 추억에 오프닝과 엔딩에 보면 벌판이 나오잖아요.

(참고 ; 김형구 감독 프로필 <봄날은 간다2001> <무사2001> <박하사탕1999이창동><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해변의여인2006홍상수><여자는남자의미래다2004홍상수> <부러진 화살 2012정지영>)

촬영감독에게는 그런 게 있어요. 앞에 일했던 촬영감독의 라스트 신이나 오프닝신을 압도해버리고 싶은 게 있잖아요. 촬영감독간의 경쟁심이랄까. 제가 조장한 것은 아니고요 (청중 웃음) 술을 드시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정말 기억에 남는 오프닝과 라스트신을 찍고 싶다.. 라고.

정말 고민을 너무 많이 했어요. 저는 저도 또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요. 80년대부터 몇 십년간 생각해왔던 이미지를 마침내 뽑아내서 손에 넣어야겠다는... 촬영 날이 점점 앞에 다가올수록.. 집에서 멧돼지를 머릿속에 생각할 때와 숲속에 들어가서 몇 십미터 앞에서 멧돼지가 왔다 갔다 할 때 심장 박동이 다르잖아요. 점점 그날이 점점 온다. 그런 것을 느끼면서 준비를 했어요.


<마더>가 2008년 9월에 크라인 크래인을 했는데 5월 쯤 인데 마음의 결심을 했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찍는 방법이 수백만 가지가 있어요. 제가 그 중에 하나를 선택을 했어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그 생각이 나더군요. 그렇게 해야겠다. '그 분이 오셨다'고 해야 하나... (청중 웃음) 그렇게 해야겠다.

제일 마지막 놓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버스를 실제로 달리게 하고 나와 카메라 조차도 그 버스와 같은 속도로 창 밖에서 달리면서 찍어야겠다. 처음에는 아줌마들이 춤을 추시면서 정면에서 찍으려고 했어요. 김혜자씨가 보였다 안 보였다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2008년 5월 어느 날 이 생각이 지워지고 버스가 달리고 아줌마들이 막 춤을 추고... 나란히 카메라를 달리면서 찍어야겠다. 생각이 드는 거예요. 2008년 5월에 말이에요. 그리고 강렬한 저녁노을 또는 아침 햇살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렬한 태양광선이 보면 아줌마들이 관통했으면 좋겠다. 보면 아줌마들이 그림자처럼 한 덩어리로 보이잖아요.



다들 한 덩어리 같은 느낌이... 중간에 '누가 김혜자씨지?'라고 헤깔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엄마들이 모든 아줌마들이 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처럼... 김혜자를 집단화시켜버린다고 하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하나의 시꺼먼 그림자에 감춰버리는 그래서... 반대쪽에서 찍고 있는데 강력한 직사광선이 관통했으면 좋겠다.

2008년 5월에 촬영감독님하고 연출부들 앞에서 설명을 했어요. 그게 2008년 5월이었어요. 수백만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한 거지요. 이게 사실 감독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나는 이렇게 찍겠다. 나는 이런 이미지를 원한다. 그런데 이게 지금부터가 문제였지요. 이게 간단하게 느껴지지만 간단한 촬영이 아니었어요. 

이게 달리는 버스의 측면에서 보면 태양이 고도가 낮아야겠지요. 해뜰때와 해질 때는 30분. 그러니까 20분 곱하기 2번이고, 매일 촬영을 할 수는 없어요. 엑스트라 수십 명 한 번 나가서 찍고 와야 해요. 돈이 들거든요.

두 번째, 태양광선이 관통하자면 주변에 빌딩이 없어야 해요. 평야 지대여야 이 각도가 나와요. 서울시내에서는 찍을 수가 없잖아요. 길이 막혀서 못 찍지만 허허벌판이어야 해요. 구체적으로 도로에 다른 건물이 없어야하고, 도로가 남북 방향이어야 해요. 태양광선은 동서로 관통해야 하고, 버스는 남북방향으로 달려야 해요. 이 조건이 다 만족하는 곳을 찾아야 해요. 은근히 쉽지가 않더라고요. 미국은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하면 되는데 서울은 어려웠어요. 그리고 결국 그 장면을 어디서 찍었냐면 인천공항 가는데 큰 매립지가 있어요. 차들이 거의 안 다녀요. 일직선 길들을 뻗어 있고.. 춤을 추는 김혜자 선생님과 카메라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쭉 뻗은 길이 있었어요. 길의 방향이 거의 남북 방향이었어요. 그 길을 6월경에 찾아냈어요.

촬영부들은 태양각도, 자연광이 어떻게 되는지 계절별로 태양각도가 어떻게 되는지 표를 가지고 다녀요. 지금 강연장도 보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이 여름과 겨울이 태양의 각도가 달라요.

우리가 길을 먼저 확정했고 이 길에 태양광선이 90도가 되는 게 언제냐? 날짜를 맞춰보니까 ... 산부인과 가서 출산예정일을 받는 거랑 비슷한데, 딱 봤더니 2008년 1월 7일 날을 받은 거예요. 이 날이 우리가 원하는 각도가 된다. 1월 7일은 촬영이 막바지에요. 거의 끝날 때에요. 막바지에 날을 구해놓고 이날 찍어야 해요.

나가면 찍고 들어와야 해요. 영화 제작환경이 그렇게 편안하지가 않아요. 될 때까지 찍는 게 아니거든요. 이 차량을 빌리고 이 카메라 장비들이 비싸요. 그리고 4-50명의 엑스트라들. 또 그날의 날씨, 이런 여러 복잡한 조합이 있는데 그 복잡이 이루어졌을 때 나가서 찍고 들어와야 해요. 피겨스케이트도 4년간 연습했는데 빙판에 미끌어져 쓰러지면 끝이잖아요. 한 번 더 없잖아요. 설레이면서도 기대가 되죠. 대게 오랜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맴돌건데 이걸 빨리 손에 넣지 않으면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2009년 1월 7일에 인천공항으로 갔어요. 다 집합을 했지. 새벽 5시에 커플문신을 한 봉준호와 홍영표는 촬영버스에서 뒤에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봐요. 뽀뽀한 것은 아니고 하늘을 봐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날씨는. 아무리 빌딩이 없고 산이 없어도 구름이 끼었으면 못 찍는 거니까요. 그게 조마조마했는데 구름이 없더라고요. 다행히. 일단 한숨을 놓고 조감독들은 저쪽에서 아주머니들 훈련시키는데, 그런데 음악만 틀어주고 더 잘할 것 같애.. (청중 웃음)

제가 다가가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다 제 영화 네 편에 나오신 분들이더군요.

보조출연, 엑스트라계의 타짜. 그 분을 뵈니 반갑더라고요.

“아.. 이번 흔들어주십시오.”

“아.. 이런 거 걱정마.”

기회는 두 번이에요. 해 뜰 때 30분, 해질 때 30분... 아침30분에 승부를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이건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아침에 카메라 몇 번 찍었지요. 카메라 한 번 돌리는데 take라고 하는데 .. take1, take2,... 다섯 테이크 정도 찍어보았어요. 몸도 풀고.. 해가 쭉 올라가면 그 사이에 다른 장면을 찍는 거죠.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 같은 거... 마지막 30분을 기다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영화라는 게 그래요. 영화를 사실 준비를 엄청나게 많이 했잖아요. 태양각도 때문에 날짜도 정하고, 이런 지형 다 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카메라로 돌아가면 통제할 수 없는 위험들이 있어요. 더구나 이것은 달리는 차를 쫓아가면서 흔들리는 망원렌즈로 찍는 거예요. 줌 인 하면서. 그걸 어떻게 일일이 조절하면서 찍겠어요. 그때 메이킹 필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쫓아가는 차에 타고 있었거든요. 홍영표 감독은 카메라를 잡고 있고 저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 두 대를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데, 이 버스 안에는 춤추는 아주머니 밑에 조감독들이 바닥에 다 엎드려 있고 무전기를 잡고 있지요. 운전기사 옆 석에 앉아서 저는 소리를 지르고 “ 3번 아줌마 더 세게!” 라고.. 혼란스러운 터널처럼, 아우성치면서, 그렇게 찍고 있는데, 일시적으로 홍영표 감독이 김혜자 선생님을 일시적으로 놓쳤어요. 놓친 게 당연해요. 카메라 안으로 태양역광이 들어오고, 막 차가 흔들리는데, 그거 어떻게 안 놓칠 수 있겠어요.

놓쳤지만 당황하면 안 되거든요. 자연스럽게 이쪽 저쪽을 훑어보는데 그때 우리가 계획한 것은 아닌데, 김혜자 선생님이 처음으로 카메라 등을 돌려서는 카메라를 등지고는 대게 격렬한 춤을 추고 있는데, 그 타이명이나 로맨틱한 느낌이 기가 막히게 맞았는데, 그걸 조감독이나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거든요. 그때 대게 짜릿했었죠. 모니터를 보고... 김혜자 선생님에게 왜 그러셨냐고 물으니까. 김혜자 선생님이

“모르겠어요. 그냥 태양을 향해서 화이파이브를 했어요.”

“참 잘하셨어요.”

지금도 살아있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감독인 장뤽고다르가 영화를 찍다가 어느 순간 그 옆으로 계획이 없었던 트럭이 휭 지나갔는데.. 그게 여자의 심리나 그 신의 분위기를 열배 더 완벽하게 영화적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 분이 어떤 표현을 했냐면, 프랑스인들은 대게 거창한 수사학을 좋아해요. “아 이것은 신이 예술에 준 선물이다” ... 고작 트럭 하나 지나간 것 가지고.. (청중 웃음)

그 장면을 보면 그 감독은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물론 그 거창한 표현을 하는 것은 대게 민망하지만, 분명히 준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세밀하게 콘트롤 해도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예기치 못한 모멘트들이 있어요. 그게 아마 실사 영화를 찍는 매력이기도 해요. 그 모멘트가 주는 황홀감은 마약과 섹스 보다 강렬한 게 아닌가.

그 순간이 있엇어요. 아까 보셨던 그 장면이... 2009년 1월 7일이었는데 마침내 찍었죠. 이게 오케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암 덩어리가 훅 빠져나간 느낌이 들고. 그 장면을 찍고 저는 오랜 시간 십몇년 동안 잠복했다가 5년간 머릿속에 있었고 그것을 현실화시켜야 하는 홍영표 감독의 입장에서는 그게 도전이자 짐이잖아요. 그 짐을 벗어버리는 순간이에요. 보통 현장에서 감독이나 촬영감독이 자기들이 찍어놓고 요즘 말로 자뻑한다고... 자기들이 찍어놓고 자기가 만족해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하고 챙피해 한 거거든요. 이 장면을 찍었을 때는 저나 홍영표 감독이 사실 마음으로 주체할 수 없어서, 그렇지만 스텝들이 보면 챙피하니까 천막 뒤로 가서 둘이 어떤 행위를 했어요. 챙피해서. 누가 봤더라면 대개 닥살돋을 만한 행위를 감독과 촬영감독이 뒤에서 했지요.

그날 촬영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기분이 묘하더군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이었는데 그 이미지를 손에 넣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끝)